넘어졌다.
축제 당일에 바동까지 뛰어가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고 나서 바로 든 생각이 있다.
사람의 반응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는 것과
오랜만에 넘어져서 짜릿한 것이다.
하필이면 흰셔츠가 의상인데
한 쪽이 흙이 묻고 피로 물들었다.
뭐 딱히 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널브러진 안경을 주워준 것은 다른 사람이다.
넘어진 통증보다는 창피함이 더 컸다.
손바닥은 그래도 제 기능을 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던 21번의 그 소녀처럼
턱에 피칠을 하지는 않았다.
별 거 아니라고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신경이 쓰였다.
지금은 드레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
날은 어두웠고 눈은 아무것도 없다고 오해를 했고
머리는 당연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볼라드 사이를
지나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근데 결과는 넘어진 것이다.
비타민과 아연을 씹어 삼키는 일이 번거로웠다.
크지 않은 일에 기회를 날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베지밀에는 베지밀 에이와 비가 있다.
베지밀 에이는 담백한 맛이고
베지밀 비는 달콤한 맛이다.
소품실에서 찾은 선반은 쓸모가 있었다.
사진을 찍었고 단톡방에 공유했다.
소품실은 답답했고 같이간 친구들은 땀을 흘렸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데
누구한테나 친절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과잉친절장애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보이는 오해에 대해서는 굳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성가시는 일에 가능성을 부여한다고 생각을 하니
이불을 뒤집어 쓸지 아니면 가진 것을 내려놓을지 고민이다.
도서관에 들렀다.
책을 반납하는 마지막날이다.
이미 읽었지만 사진이 많은 책이라
한 번 더 읽기로 했다.
개천절에도 도서관 열람실은 열려있었다.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무거운 가방을 개시했다.
넘어진 일이 생각났다.
괜히 팔꿈치와 손목에 있는 상처를 만져봤다.
영혼이 없는 말이라서 그때는 꽤 충격이었다.
그래도 피가 철철나는데 말이다.
슬픔은 잠시, 기쁨은 계속
이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맞지만 슬픔은 생기면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서 잠을 잔다.
그 잠은 깨우는 순간은 사는 동안
언제든 찾아 올 수 있다.
누구나 일을 하고 있다.
펜을 쥐는 일이나 삽을 쥐는 일이나
같은 일이다.
'노동은 예술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관통하는 말이다.
일상에서 조금만 바꾸면 춤이된다.
일상은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육체노동에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초승달이다.
빛이 갈라지는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사람들하고 회식을 했다.
흰색셔츠를 빨았다.
핏자국은 사라지고 흙자국이 남았다.
소매를 접으니 보이지 않았다.
같은 물건으로 다시 주문을 했다.
셔츠를 버릴 생각은 없다.
자국이 남아서 잘 때 깨워줄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종일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하루면 족하다.
새 눈을 샀다.
코에서 흘러내리지도 않고
흐릿하지도 않다.
다른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아직 어지러운 일.
언덕 위에 빨간집을 보려면 미간을 찌뿌릴 필요가 있다.
얼마 안되는 돈에 꽤 고민을 하기도 했다.
넘어졌던 일.
어딘가 남아 잠깐씩 또
한심한 짓을 할 때마다 다시
깨서 시끄럽게 하겠지만
집 하나 생겨도 놔두는 건
이럴 때마다 다른 등이 보였기때문이다.
다시 이해하는 척 오해를 해볼까 한다.